‘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랬다. 똑같은 아침이 열리고, 똑같은 차를 타고 똑같은 거리를 달려, 똑같은 회사 사무실에 가 앉아 있지만, 난 이미 예전의 문인석이 아니었다. 더이상 회사에 나오는 길이 짜증스럽지도, 내 인생이 엉키고 있다는 답답함도 없었다. 정말이지 ‘everyday appyday’ 그 자체였다.
내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일을 찾아냈다는 것, 그건 내 삶을 모처럼 의욕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 당시 엘지애드에 다닐 때도 베스트 드레서로 꼽힐 만큼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썼다.
연봉 1천 7백만원대의 신입 사원이었지만 한 달 용돈으로 1백만원을 펑펑 써버렸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돈을 먹고, 놀고, 입는 일에 보냈다.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그런 한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퇴근만 했다 하면 패션 사업을 위한 준비로 1분 1초를 아껴 썼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 유명 패션 회사들에 관한 자료를 찾으러 다니고, 그들의 성공사를 꼼꼼하게 분석해서 정리하느라 하루가 24시간뿐인 걸 원망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시간이 모자랐다.
마침내 대략적인 사업 계획을 짜냈다. 패션 사업을 위한 첫 단계는 바로 동업이었다. 사실 패션 사업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패션이라는 것, 사업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주위에서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다. 내가 처음부터 알아서 시작해나가야 할 일이었다. 먼저 준비 기간을 갖기로 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만 4년을 일종의 워밍업 단계로 잡았다.
내가 30세가 될 때까지는 무조건 배우자는 생각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 도안 만반의 준비를 갖춰나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작게나마 옷가게를 직접 해보기로 했다.
소비자의 반응이나 영업, 유통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하는 데는 같은 회사 선배의 영향이 컸다. 그 선배
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친구 영화사에 돈을 투자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 선배 역시 영화 쪽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영화사를 해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선배에게도 그 투자는 일종의 준비였던 셈이다.
난 그 선배가 부럽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내가 그럴 때마다 그 선배는 내게 말했다. “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사업을 배우기 위해 수업료를 내고 있다. 수업료 없이 성공할 순 없다.” 그 말에 크게 자극받은 나는 더더욱 용기를 냈고 내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래, 나도 4년 동안 수업료를 내보는 거야.’ 드디어 나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옷가게를 오픈하게 됐다. 본격적인 사업을 위한 연습 게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침 여자 친구로부터 친언니가 옷장사에 관심이 많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일단 그 분과 동업하기로 했다. 월급을 탈탈 털어 3백만원을 만들었다. 그 돈은 초도 물건을 떼 오고 인테리어를 하는 데 쓰여졌다. 그때가 1996년 겨울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반칙왕’에 나오는 송강호처럼 나에게도 이중 생활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는 내 장사를 하는 비밀이 생긴 것이다. 가게를 얻을 때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점심 시간이면 택시를 타고 홍대 앞을 휘젓고 다니며 가게 터를 물색하곤 했다. 퇴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마침내 터를 잡았다.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60만원짜리였다. 주차장을 개조한 곳이라 다소 쌌다.
터가 그렇다 보니, 인테리어가 걱정이었다. 주차장이라 바닥이 평탄치 않은 것도 마음에 결렸다. 상황이 어렵다는 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또다른 이야기. 퇴근만 하면 그곳에 가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시멘트 작업을 시작했다. 일요일도 없었다.
바닥을 고르게 메우는 일처럼 내 모든 자투리 시간도 몽땅 한곳으로 모았다. 실내 인테리어도 우리가 직접 했다. 공사장에 가서 파이프나 폐타이어 등을 가져와 재활용하고, 바닥과 천장에는 잡지책을 통째로 더덕더덕 붙였다.
포스트모던한 인테리어였다고나 할까. 하여튼 이 인테리어가 얼마 가지 않아 대유행이었다. 그 근방 홍대 앞이나 이대 옷가
게들이 우리 인테리어를 많이 베껴 간 것이다.
조그만 가게 하나 오픈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퇴근 후 가게에서 뚝딱거리다 보면 어느새 새벽 2시가 훨씬 넘어서 있곤 했다. 집에 가서 겨우 손발만 씻고 곯아떨어졌다가, 다시 아침이면 출근하고…. 그때 회사 가서 엄청 졸았었다. 96년 11월부터 연말연시를 그렇게 보냈다.
마침내 그 해 12월 26일 가게를 오픈했다. 가게 이름은 ‘키치’. 비주류, 언더 등을 뜻하는 문화 용어로 내가 직접 지었다. 그건 우리 가게에서 취급할 물건을 고려한 이름이었다.
‘주류’에서 벗어난 ‘비주류’들이 찾는 옷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우리 가게에서 주로 팔았던 게 중고 의류였다. 당시 중고 의류가 한창 유행이기도했고, 동업한 친구 언니가 중고 옷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 숍에는 연예인들과 코디네이터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됐다. 옷이 좀 독특했던 모양이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생을 쓰면서 누나가 주로 장사를 했다. 난 엘지애드에서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그 곳으로 다시 출근(?)해야 했다. 그날그날 매출에 대한 상의, 옷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을 이야기하곤 밥 10시면 가게문을 닫았다. 이대부터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우선 누나와 동대문 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 오는 일부터가 시작이다. 3시간 동안 여기저기서 산 물건은 다 내 차에 실어놓고, 날마다 누나를 의정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다시 가게로 돌아와 물건을 내려놓고 나면 새벽 3시를 넘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제서야 회사 앞 고시원으로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아침이면 출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때 난 삼성동 집에서 나와 회사 근처 마포에서 한 달 18만원짜리 고시원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집을 오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엇다. 물론 몸은 무척 고달펐다. 그렇지만 내겐 희망이 있었기에 그 힘든 생활을 힘들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지금 내 시작은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4년 후면 이 가게가 발판이 되어 사업을 하리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요즘이다.